Fujisawa Ne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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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부 마사노부
1897

북쪽의 섬 입구에 있는 청동제의 도리이 옆에 「신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메이지가 되고 나서 매립된 장소입니다. 참배길 양 옆에는 「에도야」, 「사누키야」, 「사카이야」, 「이와모토로」, 「에비스야」라고 하는 료칸의 이름이 보입니다. 두 번째 도리이 끝에는 「학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가타세 초등학교 에노시마 분교로, 에도시대에는 삼층탑이 있었던 곳입니다(현재의 시민의 집 자리). 「학교」에서 남쪽(위쪽)으로 이동하면 스기야마켄교가 그 돌에 채여서 침술의 비법을 터득했다는 「후쿠이시」가 있으며, 그 끝에 「헤쓰노미야」가 있습니다. 야사카 신사가 인접해 있는 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쓰노미야」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카쓰노미야」가 있습니다. 「나카쓰노미야」에서 더 이동하면 왼쪽에 서양 풍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은 요코하마의 무역상 사무엘ㆍ콕킹이 메이지 시대에 거주하였던 저택이라고 생각됩니다(현재의 가든 팔러). 더 가면 벽돌 담에 둘러싸인 「식물원」(현재의 사무엘ㆍ콕킹 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속 이동하면 「오쿠쓰노미야」에 다다르며, 계단을 내려가면 「지고가후치」, 「미이와(암굴)」에 다다릅니다.
입구의 청동제 도리이의 왼쪽에는 「히가시마치」라고 기록되어 있는 어촌마을이 퍼져 있습니다. 또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융기된 「쇼텐지마」가 아직 바다에 솟아있는 상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소슈 에노시마 진경

우타가와 구니요시
1844-54

삼부작의 전체 공간을 활용하여 에노시마 섬은 거대한 바위, 큰 바위, 그리고 절벽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마치 불룩한 바위에 맞서는 개미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일찍부터 서양식 회화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그가 섬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타가와 구니요시

화면 가득히 갈색과 남색으로 그려진 크고 강해보이는 바위 덩어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야나 지고가부치 부근의 바위 밭을 순례하는 참배인의 모습은 너무 작게 개미와 같이 그려져 있어 에노시마의 크기와 대칭적입니다. 섬 상부에는 가미노미야, 시모노미야, 망원경, 오른쪽 아래에는 어부 마을, 왼쪽 아래에는 이와야, 지고가부치가 있습니다. 에노시마 전체를 큰 덩어리로 표현한 것은 서양풍을 도입한 구니요시다운 작품입니다. 구니요시의 화계는 그 문하생에 요시토라, 요시이쿠, 쓰키오카 요시토시 등 막부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대가를 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시토시에서 미즈노 도시카타, 도시카타에서 가부라기 기요카타, 기요카타에서 이토 신스이, 가와세 하스이로 사제류파로서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로 이어지는 우키요에의 계통에 꽃을 피웠습니다.

歌川国芳 相州江之嶋之図

사가미 지방 에노시마 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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